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치아 공화국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건국 이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 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 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되었다. 물론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터 1419년까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오스만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부터였다. 1422년 오스만 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는데,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오스만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살로니키는 이때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술탄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제4차 십자군 전쟁|병주고 약주냐?]]~~. 그러나 교황청과의 협상 등이 발목을 잡은 데다 당시의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터져버렸고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이후 베네치아 함대는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당시 오스만은 육상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차라리 당시 오스만 출신 해적들이 출전하는 게 나았을 정도였으므로 해전이 벌어지면 베네치아측의 승산은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오스만 술탄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적시에 개입했다면 전쟁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인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치고는 큰 영토를 이용해서 1만단위의 육상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참가했다고 해서 베네치아 혼자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수도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들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던 비참한 상태라서 [[오스만 술탄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장기적으로 로마의 멸망을 막으려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인데 당시 서유럽은 동유럽에 눈을 돌릴 상황이 되지 못했으므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베네치아는 일단은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베네치아가 [[도시국가]]치고는 당시 유럽의 중소급 [[국민국가]]에 가까울 수준의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도 식민지와 본토 속령까지 다 합쳐서 [[1557년]]에는 215만 명에 도달하였으며 경제력과 도시화율도 높긴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오스만 제국과 정면승부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 ^^(1512년 ~ 1520년)^^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했다. 1499년 오스만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어왔다.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1503년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러스|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에게 할양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십자군|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